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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 광부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by 참새∂ 2021. 1. 10.

1월 9일 방송된 '전지적 참견시점'에 출연한 배우 유태오. 그는 방송에서 어릴적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파독 광부, 간호사의 2세라는 사실을 밝혀 화제가 된 바 있다. 파독이라는 뜻은 독일로 파견했다는 뜻인데, 당시에 왜 우리나라가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 등 많은 인력을 독일로 파견해야만 했을까.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선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195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6.25 한국전쟁 직후 황폐화된 국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한민국의 국토는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황폐화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발전된 도시, 수많은 건물들의 모습들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기간동안 계속해서 떨어진 폭격 등으로 인해 각종 기반 시설, 공장, 병원 등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경제는 끝없이 곤두박질 치게 된다. 특히나, 각종 중공업등의 공장, 발전소들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 당장 벌어먹고 살게 싹 사라진 상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과 북한의 연도별 경제력 비교

전쟁 직후, 한국과 북한의 경제력을 비교한 그래프로, 전쟁 직후 끔직하게 가난한 우리나라의 경제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당시에는 아프리카의 어떤 국가들보다도 더욱더 가난한 나라였으니, 오죽하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땅이라고 외신 기자들이 당시의 전쟁을 치른 한국을 바라보며 말했을까. 


경제 원조에 의지하는 나라 '대한민국'.

지금에야 수출을 통해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당시엔 당장 국민들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공장들 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주도한 한국 경제 원조에 의존을 하며 많은 국민들이 근근히 삶을 이어갔다. 이후 1960년대에 박정희 정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외국의 차관을 끌어오는 것. 전쟁이 끝난지 10여년이 지난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피폐한 국가의 경제를 살리기엔 한참 부족한 시간이라 해외 여러 나라들에게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여러 국가들중 하나가 당시 분단국가였던 서독이었고, 독일로부터 차관을 끌어다가 우리나라 내부 기반 시설에 투자하기 위해 한.독 차관 협정, 한독 경제협력 의정서등 여러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돈을 빌렸으니.. 갚아야지?

돈은 빌렸으니 갚는건 당연지사. 하지만 무일푼이었던 당시의 대한민국에 서독이 무엇을 믿고 막대한 돈을 빌려줬을까. 당시 독일에선 3D업종중 하나로 유명했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병원 간호사등 상당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일할 곳이 없어 실업률이 30%에 육박하고 있는 상황. 이런 양국의 만성적인 인력난을 해결할 겸 , 그리고 당시 공산진영과 민주주의 진영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인지라, 민주주의 정부인 대한민국의 경제를 부흥시킬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광부와 간호들의 파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막대한 돈을 받고 우리나라는 수많은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독일로 파견하게 된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파독 한국인의 독일 생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가정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독일로 떠나간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진행된 파견된 인원은 광부가 8,395명, 1965년부터 1976년까지 파견된 간호사, 간호조무사의 수는 10,371명.(자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고국 땅을 벗어나 머나먼 이국으로 떠난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실제 독일에서 간호사로 재직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독일 사람들이 꺼리는 업무(오물, 대변 치우기, 시체 닦기 등)가 태반이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별과 무시를 받았다고 한다. 간호사 이외에도 광부들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탄광이 무너져 내려 사람이 숨지거나, 신체 부위가 잘리거나 훼손되는 등 지하 1,000m가 넘는 석탄 광산에서 힘겨운 중노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형적인 근면함과 성실성을 보여주며 차츰 현지인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자리를 잡아갔다. 

 

파독 이후의 삶

당초 계약기간은 3년. 이 3년 동안 대한민국 수출액의 약 20%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인 노동자들은 계약기간이 끝나고 나서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반면, 계약을 연장해 독일에서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인 광부, 간호사끼리 결혼을 한다던지, 한국인 간호사가 독일인과 결혼을 하는 등 정착을 하게 된다. 이때 독일에 남게된 여러 사람들이 현재 독일 최대이자, 서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한국 교민사회를 만들어 살고 있다. 독일에서 은퇴한 이후, 노후를 한국에서 보내고 싶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정부에서 제공한 거주지에 모여 살았으니, 그곳이 바로 현재 유명한 남해 독일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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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독일마을 여행

남해 여행의 꽃이라면 꽃인 남해 독일마을 여행기. 경기도 가평에 쁘띠 프랑스가 있다면, 남해에는 독일마을이 대표적인 이국적인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쁘띠 프랑스와 다른 점은 초기엔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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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해 헌신한, 어쩌면 희생된 그들의 삶을 후세 사람들에 알리기 위해 남해 독일마을에는 이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지어져 있다. 남해 독일 마을에 거주하려면 반드시 파독 근로자와 관련된 가족이어야 하고, 집을 지을땐 반드시 독일식으로 지어야 하는 등 엄격한 기준으로 거주자를 선발하고 있다.